임시정부 수립으로 수렴되었으므로 임시정부는 곧 3․1운동의 결실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3․1운동의 선언서마다 독립을 선언했고 모인 군중마다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선언이었고 고창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구체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다. 3․1운동이 국내외에서 일
운동을 계기로 큰 성장을 본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성향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현재의 국가적 민족적 과제를 성취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3․1운동에서 보여준 독립의지와 단결, 슬기가 바탕이 된 민족주의의 성장은 국내적으로 일제식민지시대를 극복하는 정신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으로 나타난 민족적 총의에 의해 설립되었다. 출범 직후 임정은 국내외 각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중반 임정은 세력이 약화되고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또 선언에서는 한일병합을 융희 황제(순종)의 주권포기로 단정하고 대신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즉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라는 독특한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민주공화제와 법치주의를 지향했다.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략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어떤 조직이 필요하고 어떤 조직이 적절했던가? 그것을 임시정부가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3·1운동이 끝나가면서 당시의 조선인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희망과 기대를 걸었다. 그러한 민족적 기대치에 어긋나지 않
정당조직의 결성에 대한 움직임은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되는 고비마다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920년대 전반기 임시정부의 활동이 외교노선에 치우치고, 중국동북지역과 노령지역의 무장부대를 통일적으로 지휘할 수 없게 되자, 1923년 국민대표회를 통해 민족운동의 통일방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임시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
한편 육해군 군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부서로 군무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군무부에서는 1919년 12월 18일을 기하여「임시군사주비단제」.「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대한민국육군 임시군구제」.「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 ‘육군사학학칙’등 독립군
선전을 포고하고 한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의 큰 규모의 독립군의 전투활동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활동은 이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전투행위를 한 것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 … 중 략 …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건국강령은 1941년 11